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청춘페스티벌 김어준 강연 7

제가 또 배낭여행 갔을 때에요.
배낭여행을 갔는데 그 때는 거지였거든요.
그래서 배낭을 메고 원래는 하얀색 이었으나 더 이상 무슨 색인지 알 수 없게 된 티셔츠를 입고 길을 가다가
파리에 가면 루브르 박물관이랑 오페라 하우스 사이에 큰 대로가 하나 있어요, 오페라 대로라고.
그 대로를 걷다가 왼쪽편에서 양복점을 하나를 발견했어요.

그 이전까지는 저는 양복이 없었습니다, 한 번도.
근데 그 양복점에 걸려있는 양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그 양복점 안으로 들어갔어요.
그리고 저도 모르게 그게 내 것인양 그 양복을 꺼내서 입었습니다.
그리고 양복만 입으니까 안 어울려서 와이셔츠도 하나 꺼내 입고, 넥타이도 하나 꺼내 입고, 구두도 하나 신고, 이 모든 일이 한 30초 만에 일어났어요.
마치 내 옷을 맡겨 놨다 찾는 거처럼 후다닥.

그런데 다 입고 보니 너무 멋진 겁니다. 애가.
그래서 처음으로 난생 처음으로 양복을 사야겠단 생각을 했어요.
가격을 봤더니 12만원 정도, 우리돈으로.
그때 제가 한 두 달정도 남아 있었는데 한 백이십몇만원이 남아 있었어요, 수중에.
그래서 살 수 있겠다 싶어서 사려고 옷을 벗으려고 다시 보니까 0이 하나 더 있어. 120만원 정도에요.
그때까지 내가 태어나서 샀던 모든 옷을 합친 거보다 더 비싸요.
그런데 그 옷을 벗고 나올 수가 없었어요.
뭐 평상시라면 벗고 나왔겠죠.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니까.
그런데 벗고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.

왜냐면 거울 속에 있던 아이가 너무 멋있어.
저 아이를 두고 나갈 수가 없는 거지.
그와 함께 나가야 되겠어.
그래서 주저앉아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.
이거 전 재산 인데, 두달 동안.
이걸 쓰고 나면 한 푼도 없는데. 아사할 수도 있죠.
그런데 고민을 시작했습니다.
내가 만약에 이 남은 120만원을 남은 두 달 동안, 60일간, 하루에 2만원씩, 대단히 합리적으로 계획적으로 쪼개서 잘 소비하면 그럼 그날 하루 굶지는 않고 다음날도 굶지 않겠다, 그 다음날도 예측 가능한 잠자리가 있다.
이렇게 해서 그날그날 쌓이는 행복이 있죠, 안도감, 행복.
그 행복을 60일치를 다 더해.
그러면 내가 지금 이 양복 샀을 때의 행복보다 큰가?
생각해보니까 아닌 거 같아요.
1번 나가리.

2번, 만약 내가 지금 돈이 없어서 이 옷을 못 사.
그런데 30대에 돌아와서 그 때 돈이 좀 있을테니까, 그 때 가장 맘에 드는 양복을 사면, 그럼 내가 스물다섯에 놓친 이 행복은 그때 가서 돌아 올 건가?
서른다섯의 행복은 서른다섯의 행복인거죠.
스물다섯의 행복은 스물다섯 때 사라진 겁니다. 내가 누리지 못하고.
그것도 아니다. 그것도 나가리.

세 번째로 두 달은 아직 안 왔잖아. 그렇죠. 두달은 아직 안 왔다.
그래서 벌떡 일어나서 그 양복을 샀어요.
120만원을 주고 그 양복을 사서 그걸 입고 파리에 가면 룩상부르 공원이라고 있습니다. 룩상부르 공원에서 노숙을 했습니다.

다음에 계속…

출처 : 2010년 10월 청춘페스티벌2010 김어준 강연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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